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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의학(韓醫學)의 역사2021-11-09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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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韓醫學)의 역사

한의학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韓醫學의 기원이 되는 고대 중국의 의학사를 이해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고대 한의학의 형성
기록에 따르면 초기 漢醫學의 기원과 형성 및 발전에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등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한의학의 주요인물과 서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복희(伏羲)와 팔괘(八卦) : 한의학의 씨앗
중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자연철학은 음(陰)과 양(陽)의 이원론(二元論)을 통해 자연현상의 이치를 설명한 역(易)이었습니다. 팔괘(八卦)는 고대 중국의 복희씨(伏羲氏)가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圖形)을 보고 계시를 얻어 전해졌다고 하며, 이러한 팔괘는 천지만물의 현상과 형태를 상징합니다. 한의학은 춘추(春秋)시대 말부터 진한 (秦漢)시대에 완성되어 한나라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이, 한(漢)나라에 '한의학(漢醫學)' 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2) 황제내경(皇帝內徑) : 가장 오래된 한의학 의서
기원전까지 전수되어 오던 의학지식을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의 이름을 빌어 쓰여진 책으로 현재까지도 한의학의 경전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소문(素問)과 영추(靈樞)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경이라 불리며, 음양오행육기론(陰陽五行六氣論)을 바탕으로 인체의 생리(生理), 병인병리(病因病理), 장부(藏腑), 경락(經絡), 진단(診斷), 치료(治療)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3) 신농 본초경 (神農本初經)
신농은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전설적인 인물로, 붉은 채찍으로 땅을 치고 다니면서 각종 식물의 잎과 뿌리를 직접 맛보며 이들의 성질과 약효를 터득해서 알려준 의업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신농본초경(神農本初經)은 기원전에 만들어진 약물학 책으로서 약의 효능을 소개하며 인체의 유익정도에 따라 상약, 중약, 하약으로 나누고 약의 성미(性味). 주치(主治)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 편작(扁鵲)과 화타(華陀)
편작은 서기 5세기 경의 의사로 당시의 진찰법인 망문문절(望聞問切) 등의 방법을 모두 모았으며 임상 응용에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맥진(脈診)에 정통하여 맥학의 창시자라 불렸습니다.

화타는 서기 2∼3C의 의사로 침구(鍼灸), 마취 및 외과 수술에 통달하였으며, 마비산(麻沸散)이란 약물로 전신마취를 한 후 복강내의 종양을 제거하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설 <삼국지>에 관운장의 팔에 박힌 독화살을 수술로 제거했다고 하는 화타와 동일인입니다.

(5) 장중경(張中景)의 상한론(傷寒論)
장중경(張中景)은 동한(東漢)시기의 의학가로 '근구고훈(勤求苦訓) 박채중방(博採衆芳)'의 사상으로 의학의 독특한 체계를 확립한 사람입니다. '근구고훈' 이란 황제내경(皇帝內徑)을 비롯한 옛 의서의 이론에 근거하고 선인들의 의료 경험을 중시했다는 뜻이고. '박채중방'이란 당대 의학가들의 실천 지식을 널리 채집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저서로는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이 있으며, 후세에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櫃要略) 두권으로 정리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 韓醫學의 형성과 발전
고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의 의료 활동을 알려줄 만한 문헌이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단군신화에서 쑥과 마늘이 질병 치료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고, 돌침에 대해서도 중국고서 산해경(山海經)에는 "고씨의 산에는 옥이 많고 그 아래에는 돌침이 많다"라고 기록함으로써 돌침의 소산지는 조선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조선 의학에서는 약물에 대한 지식과 함께 침구법이 시술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존속한 700여년 동나 경제, 문화, 과학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으며 인삼을 비롯한 많은 약재가 중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특히 신라의 우황이 유명하여 당나라로 우황을 수십근씩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는 백제신집(百濟新集)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초학(本草學) 서적을 편집하기도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약물학이 더 발전하여 약의 종류가 더욱 풍부해지고 국가차원의 약제 관리도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의학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신라에서는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조치로서 신문왕 12(692년)에 의학이 설치되어 체계적인 의사의 양성도 진행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최고 의료기관으로서 주로 귀족 지배층의 건강관리를 위한 약물의 공급과 질병 치료를 전담하는 전의사(典醫寺), 봉의서(奉醫署)가 있었고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으로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혜민국(惠民局)이 있었습니다. 또한 의학 교육제도의 확대와 더불어 최초로 국가고시인 과거제도가 창시되었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많은 의서가 저술 편찬되어, 현존 최고의서 중 하나인 구선활인심방(?僊活人心方),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이 편집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조선시대는 개국 초기부터 의학이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건국 초기에 태조는 육학(六學)을 설치하며 그 중 의학을 두어 의사를 양성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때는 의녀(醫女)제도가 창시되어 1406년부터 여자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였습니다. 한편 우리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저술 출판 되었고, 1477년에는 의방유취(醫方유취)가 총 365권에 달하는 방대한 서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조선 중기의 1596년에 착수하여 1610년에 완성된 허준(許俊)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민족의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에 보기 드문 의서로서 동양의학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또한 1644년에는 침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허임(許任), 사암(舍岩) 등이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18C∼19C에 들어서 개성에 삼포를 설치하여 처음으로 인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한편 이제마(李濟馬)는 다년간의 임상실무와 학문 연구를 통해 1894년 4권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저술하여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독창적인 의학이론을 수립하기도 하였습니다.

1910년 이래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는 의료제도와 시책면에서 한의학이 거의 말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말살한 것처럼 한의학도 말살하려는 정책을 감행하여 한의학(韓醫學)의 발전이 중단된 불모지대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이후 몇몇 한의학계 윈로들이 한의학을 하나의 학문계로서 정립하는 데 성공할 시점에서 6.25를 맞게 되지만, 피난 수도 부산에서 다시금 한의학계 유지들의 결집으로 비로소 한의사 제도의 탄생을 보게 되었으며, 그 후 1952년에 국민 의료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한의사 제도를 법제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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